[메디컬 인문학]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차이’와 ‘손상’만 있고, 장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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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인문학]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차이’와 ‘손상’만 있고, 장애는 없다
  • 오해영
  • 승인 2017.05.04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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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뉴스 오해영 기자] 장애 개념에 균열을 내는 문화인류학 프로젝트

‘차이’와 ‘손상’이 있을 뿐,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 곳.

아프리카 콩고 송게족에게 결함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송게족은 ‘왜 장애인이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는다. 인간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탐색을 통해 결함의 원인에 대한 답을 구한다. 서구적 맥락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제공될 수 있는 답변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다.


‘왜?’라는 질문이 서구적 맥락에서는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장애인의 삶의 상태를 개선시키는 기법은 전통적인 송게족 사회의 맥락에서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왜?’라는 질문이 중심적이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의 장애인에게는 많은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는다. 장애인들은 정상적인 생활 내에 평범한 방식으로 통합돼 있다. 특별한 의식(儀式) 없이 의학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지 않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다.

근대 서구사회에서 손상된 몸에 의미를 부여하고 치료를 결정하는 과정들은 현대 의학체계와 국가의 제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결정들은 통상적으로 생물학적 손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장애’의 정의와 분류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이들은 교육ㆍ노동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배제돼 갔다.

우리는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장애’라는 개념이 특수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장애 개념의 균열과 해체를 모색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와 문화:Disability and Culture'는 개발도상국의 장애를 다루고 있는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인식하에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연구자들이 수년간 기획한 현지조사의 성과물들이다.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주제이기에 의미가 더욱 깊다.

의료나 재활의 관점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 문제에 접근하는 ‘장애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이제 대중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장애와 관련된 말들이 제대로 된 영향력을 갖기 어려운 현실에서, 현장과 이론의 접속을 도모하는 이 같은 시도는 장애의 새로운 담론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차이와 손상은 있고 장애는 없다

서구사회에서 ‘장애’의 정의와 분류는 생물학적 손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의료기관이 손상된 몸에 진단을 내리면 국가는 장애 관련 제도와 정책에 의거해 이에 합당한 재활과 복지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손상과 질병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며, 같은 정도로 ‘장애화’되지도 않는다.


손상과 관련해 주되게 관심을 두는 측면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푸난바족, 마사이족, 소말리족 등 다양한 부족사회의 사람들은 손상 그 자체보다는 손상의 원인과 종류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손상을 입은 자가 특정한 금기를 어긴 일은 없는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은 없는지,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은 없는지 등의 여부에 대해 말이다.

사람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손상의 원인에 대해 논의하고, 이에 알맞은 치료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장애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손상의 치료과정을 의료권력에 전적으로 내맡기지 않는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손상을 입은 이들(서구의 관점에서는 ‘장애인’)은 손상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손상을 입은 이들은 그들의 능력범위 안에서 생산노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의례와 사교적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에 잘 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가족과 지역공동체의 의무이다.

한 사회 안에서도 장애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로 변환되어 감에 따라 장애인들의 노동 참여가 이전보다 축소되기도 하고, 유사한 정도의 손상이라 할지라도 젠더(gender)별로 부여되는 규범과 기대치에 따라 장애화되는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세계화되는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장애 관념들이 부딪치고 갈등을 초래한다. 늘어나는 ‘국제 이주’로 인해 이 같은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서술은 장애가 특정한 맥락을 떠나 다뤄질 수 없으며, 본질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화하는 관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장애’ : 침묵되거나, 재현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장애인들은 전과자, 민족적ㆍ인종적 소수자, 정신질환자와 마찬가지로 가치 절하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신체적 손상을 지닌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사회에 의해 부정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그의 사회생활 중 많은 부분은 이렇게 부여된 부정적 이미지와의 투쟁이 된다. 우리가 낙인화란 장애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소간 부산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그의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그러한 결함에 덧붙인 일련의 신화ㆍ두려움ㆍ오해들이다.

장애는 많은 경우 침묵 속에 고립돼 있었다. 서구사회에서 장애는 발설되지 않아야 하는 것,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됐다. 다른 이의 손상을 가리키거나 응시하거나 언급하는 행위는 일종의 무례함 혹은 금기처럼 여겨진다.

부족사회의 사람들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특정 손상에 대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례적인 특성’과 ‘차이’들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매우 난감한 것이고, 많은 이들에게 침묵과 회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장애인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매체에 의해 특정한 이미지로 재현되기도 한다.
그 중 한 예가 조지프 메릭의 사례이다. 심각한 안면장애를 앓아 ‘엘리펀트맨’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그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로 ‘전시’되었으며, 이후에도 영화나 연극, 책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이미지로 우리 앞에 ‘재현’되고 있다. 무수한 말들 속에서 정작 자신의 말을 잃은 조지프 메릭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주체적인 힘을 부정당한 채 특정 주체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재현되는 상황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특정 이미지의 재현은 비서구사회의 장애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장애인들은 자선단체나 연구자들에 의해 ‘가족들에게 학대받는 이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다.

장애인들의 정체성은 또한 다양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협상되기도 한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가 혁명전쟁으로 인해 상해를 입은 군인들에게 ‘영웅’, ‘순교자’ 등의 이미지를 부과한 후, 최상의 재활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반정부파는 장애인들을 ‘혁명의 피해자’,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서 그려냈다. 니카라과의 사례는 장애인의 정체성이 다양한 정치적 목적과 수사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얼마든지 다른 정체성으로 협상되고 변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여러 사례를 통해 우리는 ‘장애’가 특정 주체들에 의해 침묵되거나 재현되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달리 주장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장애인 차별 철폐를 넘어, ‘장애’ 그 자체의 철폐를 위해

2017년 대선에서 장애계에서 뜨거운 이슈는 바로 ‘장애등급 철폐’였다. 정부는 2007년 4월부터 장애수당을 신규로 신청하는 중증장애인에 대해, 일선 의료기관의 장애판정 자료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로 보내 장애등급을 최종 결정하도록 하는 장애등급심사제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사는 2009년 10월, 2010년 1월과 7월에 걸쳐 전면 확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장애인들의 등급이 하락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본래의 등급에서 하락된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서비스를 비롯한 각종 복지혜택에서 제외됐다. 하루아침에 손발이 꽁꽁 묶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장애등급 폐지는 특정 손상을 장애로 범주화하고 여기에 등급을 매겨 차별적으로 관리하는 국가권력의 작동원리에 문제제기다.
근대 국가권력이 정책의 수립과 효율적 시행하위해 자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장애’라는 범주와 등급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장애인의 개별적 삶은 제도 안에 꽁꽁 묶여 정책과 제도가 바뀔 때마다 무참히 잘려 나가고 말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 온 장애등급제는 과연 철폐될 수 있을까? 우리들 자신부터 장애등급제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볼 수나 있는가?

우리의 익숙한 시각과 처지에서 벗어나 새롭게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른 문화의 사례와 양상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장애는 어떤 사회에는 장애정책의 시행을 위한 등급제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사회에는 ‘장애’라는 보편적인 범주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 모든 사회에서 배제되고 억압받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정체성은 한 사회의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방식은 이처럼 각 사회가 처한 맥락 속에서 다르게 구성되는 손상의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장애에 차별적인 우리 사회가 지금과는 충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장애’의 의미들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동시에, 차이가 차별로 구성되지 않는 ‘장애’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장애인 차별 철폐를 넘어, 장애라는 ‘보편적’ 범주의 철폐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다.

자료: : Disability and Culture,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저자 베네딕테 잉스타, 수잔 레이놀)



오해영 기자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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