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➁ 내남편 이승만]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이승만, “부엌일 못 돕는다”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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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➁ 내남편 이승만]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이승만, “부엌일 못 돕는다” 선언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2.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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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비용 부담한 프란체스카, 제주도산 진주알 한 개 선물받아
조선시대 서당에서 공부 시작하여 하버드대 석사와 프린스턴대 박사 취득

다음날 신문에 이승만 박사에 관한 기사가 실리자 프란체스카는 그 기사를 오려 호텔 안내 데스크에 맡겼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 박사가 어려운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프란체스카는 봉사를 자청, 몇 건의 서류를 타이핑 해주었다. 

계속 돕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귀국을 서두르는 바람에 그녀는 예정을 앞당겨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몰래 김치맛 나는 사워크라푸트 한 병을 호텔 고용인에 맡기고 떠났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회사를 수신처로 제네바에 있는 이 박사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해 7월 7일 모스크바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이 박사는 프란체스카와 재회했다. 이 박사는 그날 프란체스카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고 일기에 그날의 만남을 ‘비엔나 연사’(戀事, the Vienna Affair)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많은 어려움과 반대를 물리치고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이 박사는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했는데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 보내게 되다니…”라며 애석해 했다.
 
후일 프란체스카는 며느리 조혜자 씨에게 “친정 어머니나 언니들이 알았으면 기절했을 일이지만 실은 내 결혼반지값은 신부인 내가 지불했다”고 일러주었다. 결혼 비용도 모두 프란체스카가 부담했다. 이 박사로부터 받은 선물은 녹두알만한 제주도산 진주알 한 개가 전부였다.
 
이승만 박사는 1875년 황해도에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양녕대군 16세손으로 아버지 이경선 씨는 보학(譜學)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였으며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이승만은 열다섯 살 때 부모가 간택한 동갑나기 박승선 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홉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후일 두 사람은 이혼했다.
 
이승만은 소년기에 과거 등과를 목표로 서당 공부를 했다. 1894년 터진 청일전쟁 와중에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2월 주변의 권유로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조지워싱턴대(학사)와 하버드대(석사), 프린스턴대(박사)에서 국제정치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은 한국인으로서 박사학위 최초 소유자가 됐다. 그래서 대통령 시절에도 이 박사로 불렸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에서 1912년까지 2년간을 제외하고 광복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아들 이인수 박사는 “동경제대 출신들과 일제 치하를 겪은 사람들이 일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일제를 거치지 않은 이 박사는 우리나라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삶과 꿈》의 저자 연세대 국제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는 “이승만은 보기 드문 언론인 출신 학자형 정치가”라며 “동시대의 다른 독립운동가 혹은 외국의 최고지도자에 비해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평생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했다”고 기술했다. 이와 함께 “배재학당 시절부터 서향노선(西向路線), 즉 개혁 노선을 밟았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미국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이승만은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양반가의 6대 독자였던 이 박사는 결혼하자마자 프란체스카에게 “한국의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프란체스카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 남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 박사는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 자랑을 하면 바보 취급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박사는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말과 함께 “안사람은 그저 보이기나 할 따름,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고 아내에게 강조했고 프란체스카도 이 말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살았다.(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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