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⑥내남편 이승만] 땀띠연고, 비타민, 삼베 홑이불까지 일선 장병에게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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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⑥내남편 이승만] 땀띠연고, 비타민, 삼베 홑이불까지 일선 장병에게 보내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3.1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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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비 없어 어머니 장례식에 못 가
이승만 대통령 경무대에서 난로 안 피우고 담요로 감싼 채 일해
동상 걸린 프란체스카,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로 치료
사진=온라인이승만기념관
사진=온라인이승만기념관

대통령 부부는 모기에 물린데다 땀띠까지 나서 고생이 심했다.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부탁하자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 한 박스까지 보내왔다. 이 약상자를 본 대통령은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건네주었다. 

이 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워커 장군이 보낸 약에다가 오스트리아 처가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들려 보냈다. 프란체스카가 신 장관에게 땀띠연고 하나만 놓고 가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이 박사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신 장관은 즉시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디 프레세’지 특파원 편에 보내온 비타민이었다. 언니는 어머니가 틈만 나면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이며, 한국의 자유와 평화회복을 위해 친척과 이웃은 물론 단골 가게 아주머니들까지도 합세하여 금식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대통령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삼베 홑이불까지 싸보냈다. 대통령 부부는 밤새워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거적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의 형편을 알리고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보낸 구호품을 필두로 속속 금품이 도착하였다.
 
이 대통령은 식료품이 많이 들어오면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을 데리고 가서 군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양 노인을 시켜 계속 쌀값을 체크하면서 전쟁 중의 물가동향을 주시했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프란체스카도 언니의 편지를 받으면 혼자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시집온 후 17년 동안 한 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 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였으나 어머니는 한국전쟁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아내에게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여비도 없는 데다 한시라도 대통령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28 서울 수복으로 경무대로 돌아왔을 때 대통령 집무실에 고급양복 웃저고리와 양말, 소련제 양주 등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대변투성이였다. 어디서 약탈해 왔는지 세탁기 10여 대, 양복장 일곱 개도 있었다. 대강당 바닥에는 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화장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고 몽땅 털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이 대통령은 공산군을 ‘적’이라기보다는 ‘강도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겨울, 이화여대 김활란 박사가 워커 장군의 동상 기금으로 써달라며 교수들의 월급을 모아 경무대를 방문했다. 난로도 안 피우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하는 이 대통령을 보며 김활란 박사는 눈물을 글썽였다. 

김활란 박사가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라”고 권고하자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면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내 허락 없이는 안 된다”고 농담하여 오랜만에 대통령 부부는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맞은 크리스마스 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작은 초를 켜놓고 한국 음식을 준비하였다. 두 언니가 보낸 선물과 미국 친지들로부터 온 선물을 식탁에 쌓아놓았다. 대통령이 크리스마스 저녁 단 한순간만이라도 비참한 전쟁의 비극을 잊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1·4 후퇴 때 프란체스카는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중요한 기밀 서신을 타이핑해야 했던 아내가 몹시 괴로워하자 대통령은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프란체스카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자코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시 부산 임시관저에 미국 무초 대사와 미국 장군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면 동상치료 연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이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신세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결국 이 대통령이 가르쳐 준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생일을 맞았을 때 이 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프란체스카는 그때를 가장 잊히지 않는 생일날이라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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