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⑦내남편 이승만] 프란체스카는 '최상급 비서이며 정치적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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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⑦내남편 이승만] 프란체스카는 '최상급 비서이며 정치적 동반자'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3.18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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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의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는 말에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
죽고 사는 건 하나님의 뜻, 전쟁 중에 권총과 극약 지니고 다녀
사진=이승만기념관
사진=이승만기념관

전쟁 중에 이 대통령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없이 죽는 게 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라는 유서를 써서 갖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후사 없는 불효자’란 대목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 박사는 화가 나면 가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고 소리를 쳐 아내를 울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모제르 권총 한 자루를 머리맡에 두고 “이것은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천당으로 보내줄 티켓”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프란체스카가 “우리 두 사람 티켓은 잘 간수했어요?”하면 “잘 있지”하며 크게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극약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전란을 겪는 동안 여러 차례 죽음과 마주했지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평안함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데다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극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그토록 비장하고 심각한 순간에 경무대 뒤뜰의 김치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김치 걱정을 했다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은 한밤중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력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한 후 손가락을 후후 불며 한밤중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했다. 부관이 “지금 취침 중이니 나중에 전화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우리 국민이 다 죽어가는데 무슨 소리냐”며 손끝을 후후 불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을 때 각 손톱들 사이마다 꼬챙이를 끼우는 고문을 당해 그때부터 손가락을 부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대단히 강직하였으며 국익과 관계하여 사람을 대했다’고 평가했다. 전쟁 중에 미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이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이승만 같은 한국 지도자를 상대해야 했던 군정은 다시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나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과는 대단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밴플리트, 콜터 장군을 비롯한 유엔군 장성들과 미국 대사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친아버지처럼 따랐으며, 프란체스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내왕이 있었다. 아들 이인수 박사는 이 대통령이 미국 고위층들을 부하 다루듯 했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 대통령은 화가 나거나 고민이 있으면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러면 프란체스카도 함께 침식을 금했다.
 
1990년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역사의 잘잘못을 따질 능력은 없지만 6·25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꿋꿋한 줏대와 배짱으로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다. 참상을 겪으면서도 남의 것을 훔치는 국민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여성의 정조관념도 대단해 서울의 어느 처녀는 유엔군 흑인병사가 껴안자 수치심을 못 이겨 한강에 투신자살까지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새벽 서울을 버리고 남하한 것이다. 국민들이 미처 피할 겨를 없이 정부가 피란 결정을 내려 희생자가 늘어났고 이후 이렇다 할 저항 없이 계속 밀리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피력했다.
 
프란체스카는 또 “3선 개헌 파동을 겪었지만 그때 내가 3선 개헌의지를 적극 만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연세가 많은지라 주변의 아부를 물리치지 못했고 나 자신도 대통령에게 항상 여자는 보일 듯 말듯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3선 개헌에 내심 반대하면서도 막지 못했다. 3선 개헌만 없었더라면 대통령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며 4·19 때 꽃다운 젊은 생명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란체스카는 알뜰한 경무대의 안주인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의 건강을 돌보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비서관을 지낸 안희경씨는 프란체스카의 역할을 이렇게 말했다.
 
“비서가 몇 명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오는 편지나 신문을 분석하는 일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여사가 직접 타이프를 쳤습니다. 이 대통령도 직접 타이프를 쳤어요. 외교문서는 두 분이 처리했지요.”
 
연세대 유영익 교수는 프란체스카를 ‘최상급의 비서이며 정치적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아들 이인수 박사는 광복 후 미군정 때와 6·25 전쟁 시 유엔군을 맞을 때와 보낼 때, 해외 원조를 받을 때 퍼스트레이디가 백인이라는 것이 국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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