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⑮내남편 이승만] 프란체스카 귀국, 이화장 개방 첫날 1만5000명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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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⑮내남편 이승만] 프란체스카 귀국, 이화장 개방 첫날 1만5000명 몰려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4.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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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 예배 참석과 매주 금요일 이승만 대통령 묘지 방문이 외출의 전부
외국 대사와 옛 외국 관료, 미군 장성 출신들, 이화장 찾아와
프란체스카 여사를 환영하는 안파.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프란체스카와 만남을 자주 가지면서 유양수 대사는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빈틈없는 인상은 사라지고 내면에 따뜻한 정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죽으면 남편 옆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며 자나깨나 이 박사 생각뿐이라고 했다.
 
유 대사는 언제라도 귀국할 결심이 서는 대로 한국에 돌아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말씀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예우나 생계 지원 문제도 제도적으로 확정되었으며 이 박사 내외의 재산문제도 잘 정리되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귀국할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후 프란체스카와 유 대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식사를 나누었다. 유 대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화제는 대부분 이 박사였고 국제정세와 한국정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여사는 뉴스위크지나 타임지를 빼놓지 않고 읽고 있었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과거 자유당 시절의 정치이야기나 특정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구 정치인이나 현지 의원, 정부 요인들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김정렬 전 국방장관, 한국일보 기자였던 정광모씨 등 몇 사람만 만났다.>
 
1969년부터 프란체스카의 귀국 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70년 5월 14일로 출국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신변 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프란체스카는 유 대사에게 자기가 사용하던 가구를 기증하고 싶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ㄷ자형의 단층집으로 큰언니의 딸 앨리스의 집이었다. 소파 침대 옷장 냉장고 책상 의자 등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조립식으로 소박했다. 유 대사는 이 물건들을 대사관으로 옮겨놓았다.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날 친척 20여 명이 비행장에 배웅을 나왔다. 프란체스카는 70세, 언니 베티는 73세였다. 프란체스카는 이후 이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70년 5월 16일,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공항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부요인들과 김일환 윤치영씨 등 구 자유당 정부인사들이 나와 그녀를 영접했다. 프란체스카의 귀국은 오스트리아에서도 신문과 라디오 TV를 통해 자세히 보도되었다.
 
1970년에 귀국하여 1992년까지 프란체스카는 이화장에서 아들 이인수 부부와 함께 살았다. 이화장에서의 생활은 근검절약의 표본이 되고 있다. 1992년 3월 19일에 프란체스카가 세상을 떠난 후 1993년 3월에 열린 추모 유품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알뜰함과 검소함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에서 위염으로 고생을 해 식사를 제대로 못했는데 귀국한 이후 거짓말처럼 나았고 체중도 불었다. 며느리 조혜자 씨는 어머니가 22년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고 일러주었다. 다만 사망하기 3개월 전에 방안에서 넘어지면서 체력이 약화되어 약간의 치매 증세와 함께 누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살아 있는 동안 이화장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경무대 식구들을 비롯하여 자유당 시절 이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외국 대사와 옛 외국 관료, 미군 장성 출신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1988년 기념관을 조성해 이화장을 일반에게 공개하면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화장을 찾았다. 첫날은 1만 5000여명이 몰려 큰 혼잡을 이루었다. 해외동포 내외국인 등이 매일 수백 명씩 찾아왔다. 프란체스카는 창문을 열어놓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해주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린이 단체 관광객을 특히 반겼다. 이화장을 개방했을 때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녀는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못 받게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런저런 단체에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거절하고 이화장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정동교회 예배 참석과 매주 금요일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해 이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외출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서는 프란체스카 일행을 보고 오스트리아인이 다가와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죠.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왔습니다”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오스트리아에 태어났을 뿐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이인수 씨는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했다.
 
“머리를 뒤로 쪽을 찌고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어요. 양식은 거의 안 드시고 한국음식만 드셨지요. 나라 걱정, 국민들 생각으로 하루해를 보내셨어요.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게 보이면 이산가족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라고 당부하셨지요. 무슨 물건이든 어머니는 그것을 영구적으로 아니 영원히 사용하셨어요.”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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