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칼럼] 함부로 '미쳤다'고 외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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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칼럼] 함부로 '미쳤다'고 외치지 말라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1.13 0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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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

요즘 방송에서 시도때도 없이 난무하는 말이다. ‘맛있다, 멋있다, 최고다’ 같은 단어를 ‘미쳤다’가 대체하는 중이다. 멋진 풍경을 보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좋은 물건을 보다가 ‘미쳤다’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정리하는 소위 방송인이라는 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11일 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조선 ‘미스트롯3’에서 대학부가 등장하자 마스터 모 씨가 “미쳤다, 미쳤다”를 두 번 외쳤다. 

“평균 나이 21세, 아이돌 차림으로 등장한 다섯 여성의 등장을 왜 미쳤다고 하는 거냐?”라고 물었다가는 당장 “유행어를 모르네, 시류에 못 따라가네”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따라하고 싶지 않은 유행어, 휩쓸리기 싫은 시류가 있다는 걸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다. 

소위 방송인이라는 이들이 ‘미쳤다’를 마구 토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조차 ‘미쳤다’를 남발하는 건 봐주기가 정말 힘들다.

‘미쳤다’ 직전에 ‘대박’이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멋있어도 대박, 맛있어도 대박, 기분 좋아도 대박이라고 외치던 이들이 그 이전에는 ‘짱!’을 부르짖었다. 
 
‘대박, 짱, 미쳤다’를 왜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마디로 다 통하니까, 편하기 그지없으니까. 

나 역시 ‘대박, 짱’은 자주 애용했다. 하지만 짱과 대박을 밀고 들어온 ‘미쳤다’ 앞에서는 멈칫했다.

‘짱’이나 ‘대박’과 달리 ‘미쳤다’는 조심해서 써야 할 단어이기 때문이다. 짱은 ‘으뜸이다 정도의 뜻을 나타낸다’, 대박은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미쳤다’는 요즘 ‘사람이나 사물, 현상 따위가 어떤 범위나 한계를 뛰어넘어 아주 대단하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등극했다지만 오랜 기간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라는 뜻으로만 사용됐다. 

예능프로그램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미쳤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던 중 서평을 쓰기 위해 김예원 변호사의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을 읽다가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다. 절대로 ‘미쳤다’를 감탄사 대신 사용하지 않기로.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번은 오랜만에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조현병 환자와 근황 예길 나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서 비결을 묻자, ‘먹방’을 안 본다는 것이다. “저도 먹방 보면 식욕 폭발이라 자제하는 중이에요.” 나름 맞장구를 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미쳤다는 소리가 하도 나와서 기분 나빠서 안 봐요.”

연예인이 뭘 먹으면서 계속 “미쳤다”라고 외치는 장면, ‘미친 맛’이라는 자막이 화면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실거리는 장면을 보고 별 생각이 없었던 나와 달리 반평생을 조현병으로 ‘비정상’ 낙인 아래 살아야 했던 사람의 진심 어린 항의였다. 아직도 내 갈 길은 멀었다.

이 글을 읽고 내가 ‘미쳤다’에 거부감을 느끼고 사용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를 함부로 외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최소한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출연료를 받는 사람이라면 좀 더 적확하고 풍부한 표현을 하도록 노력하는 게 마땅하다. ‘미쳤다’ 하나로 돌려막기 하면서 과한 리액션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행태는 시청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짓이다.

한때 국민의 바른 언어생활에 이바지했던 프리랜서 아나운서들도 단말마같은 비명 대신 풍부한 어휘력으로 고품격 유머를 구사하길 기대한다. ‘노잼 캐릭터’보다 ‘무뇌아 캐릭터’가 더 빨리 무너지는 게 그간의 공식이었다. 

함부로 미쳤다고 외치지 말라. 

‘미쳤다’ 하나로 돌려막기 하다 보면 대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그리고 함부로 외치는 미쳤다로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라. 자신도 해치고 남도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은 제발 그만두시라. 제대로 된 문장으로 진심어린 감탄 문구 구사하는, 진정한 방송인을 기다린다.  
 

이근미 작가
문화일보로 등단. 장편소설 《17세》《어쩌면 후르츠 캔디》《서른아홉 아빠애인 열다섯 아빠딸》《나의 아름다운 첫학기》 비소설《+1%로 승부하라》《프리랜서처럼 일하라》《대한민국 최고들은 왜 잘하는 것에 미쳤을까》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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