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⑱내남편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모든 걸 바친 프란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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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⑱내남편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모든 걸 바친 프란체스카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4.22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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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독립운동 돕고, 12년간 대통령 영부인, 22년간 남편 없는 땅에서 한국 할머니 살다
관을 남편의 친필휘호 南北統一(남북통일)로 덮어달라
이화장을 지킨 프란체스카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화장을 지킨 프란체스카.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프란체스카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장수 비결을 묻자 “무엇에든 감사하는 마음이 저의 생활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지요”라고 답했다.
 
며느리 조혜자 씨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평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산책하고 소식한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감자를 쪄서 간식을 자주 드셨어요. 명랑하고 유머가 있고 자기 자랑을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게 웃으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살아생전에 손자들이 장가가는 것을 본 뒤에 죽고 싶다고 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92년 3월 19일 타계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죽거든 틀니를 반드시 끼워주고,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관뚜껑은 남편의 친필휘호인 南北統一(남북통일)로 덮어달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말을 늘 유언처럼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소원대로 국립묘지 남편의 옆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정동제일교회서 영결식을 가진 뒤 경찰차 한 대가 선도한 장례 행렬은 승용차와 버스 10대뿐이었다.
 
조혜자 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꼭 필요할 때 와서 필요한 일을 하고 가셨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삶은 기독교 정신이 바탕이 되었어요. 성경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셨어요. 어떤 음식이든 맛없다고 말한 적이 없고 뭘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살았어요. 언제나 사람들에게 아들과 며느리가 잘해줘서 잘 있다고 말씀하셨죠. 늘 즐거우셨기 때문에 외로울 틈이 없었어요.”
 
가끔 언론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이 조명되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다가 1996년에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1997년에는 이화장 사료를 연세대 국제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에게 넘겨 분류와 연구를 부탁했다. 현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현대한국학 연구소에서 이승만 박사를 연구하고 있다.
 
아들 이인수 박사는 건국사에 대한 연구자가 없으며 사람들이 현대사를 모르고 있다고 탄식했다.
 
“정권이기주의 때문에 역사가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정책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국민들은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권마다 대통령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역사관으로 인해 광복 후 지금까지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이화장을 찾는 이가 급격히 줄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연금과 이인수 박사의 월급 대부분은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들어갔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화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8년에 비가 많이 새서 지붕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돈을 보내와서 고쳤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을 뿐 퍼스트 레이디 중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백담사에 있을 때 아들 재국 씨를 이화장에 보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세배하게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연금이 끊어진 후 이화장을 꾸려나가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 재산세 700만 원을 낸 데 이어 환경개선 부담금과 일부 국유지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오기도 했다. 기천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화장에 대해 해당 구청에서 자원봉사자 한 명에 대한 약간의 지원금과 고장난 것을 수리해 주는 정도로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대통령 유족 연금이 끊어지고 이인수 씨가 재직하던 명지대를 정년퇴직한 후에도 이화장을 끝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조혜자 씨는 “우리 어머니는 전 세계에서 돈을 제일 조금 쓰고 세금 제일 아껴 쓰고 하늘나라 가신 분이에요. 아버님에 대한 평가에 연연해 하지 않으셨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너무 빨리 잊혀지건 간에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역사가 평가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님에 관해서 항상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정직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라고 마무리를 했다.
 
12년간 남편의 독립운동을 돕고, 12년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간 남편 없는 땅에서 한국 할머니로 살아간 파란 눈의 여인 프란체스카. 자유당 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장석윤씨는 그녀를 “이 박사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라고 평했다. (끝)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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