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⑭내남편 이승만] "경제적·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 해칠 '노예의 멍에' 메지 말라" 유언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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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⑭내남편 이승만] "경제적·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 해칠 '노예의 멍에' 메지 말라" 유언 남겨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4.08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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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재산, 이화장과 이화장에 전시된 동산 3000점이 전부
박정희 대통령, 프란체스카에게 "여생을 한국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말해
1965년7월27일 국립묘지로 향하는 길 양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 시청에서 남대문까지 연도를 가득 메웠다. 사진=(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1965년7월27일 국립묘지로 향하는 길 양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 시청에서 남대문까지 연도를 가득 메웠다.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인수 씨가 입양되기 1년 전에 작성된 유언장에는 ‘나의 동산, 부동산 모든 재산, 즉 그것이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의 아내 프란체스카 리에게 영구불변하게 상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 대통령의 재산은 헌납받은 이화장과 동산 3000여 점이 전부이다. 동산의 대부분은 이화장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인수 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로 입적하면서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 명예회복을 위해 힘쓰겠다. 이화장을 기념관으로 꾸미겠다”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이인수 씨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1963년부터 국내를 오가며 이승만 대통령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힘든 일이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 1965년 1월에 국립묘지에 안장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지관을 데리고 가서 자리까지 결정했다. 이 대통령은 그런 준비가 마무리된 그해 7월 19일에 서거했다.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 대통령이 서거하자 탈진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몇 년간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아 닥쳤던 것이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언니 집에서 생활하다 몸을 추스리고 이 대통령의 소상과 대상 때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미혼이었던 이인수 씨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화장을 복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오스트리아 생활은 오스트리아 초대 대사였던 유양수 씨가 쓴 《대사의 일기장》에 기술되어 있다. 유양수 씨는 1967년 오스트리아에 부임하여 주요 인사들을 예방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투사였고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반공지도자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주요 인사들에 대한 예방이 끝나갈 무렵 유 대사는 프란체스카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그녀에게 연락하려면 시내에 있는 그의 친척을 경유해야 했다. 프란체스카로부터 대사관에 한 번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났다.
 
그 자리에서 프란체스카는 “한국에 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여생을 한국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말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육영수 여사의 우아한 모습과 친절을 잊을 수 없으며 남편의 묘를 훌륭하게 조성해 준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기 때문에 공산국가와의 왕래가 많으니 주의를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는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묻는 유 대사에게 난처한 빛을 보였다. 고향 빈으로 돌아온 이후 북한 청년 두 명에게 가는 곳마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 간부인 친척이 한국인과 일체 접촉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고 말했다.
 
얘기를 끝낸 프란체스카는 초콜릿 상자를 선물로 놓고 일어섰다. 대사관 자동차로 시내까지 모시겠다고 했으나 한사코 사양하면서 전찻길까지 걸어갔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은 오스트리아에도 크게 보도됐다.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대사관에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란체스카였다. 흥분된 어조로 박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없는지,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물었다. 10여 일 후 그녀는 1·21 사건에 관한 각종 기사를 스크랩해서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며 이번 사건은 철저히 규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유 대사에게 대통령의 아내로서 많은 일을 겪어야 했고 때로 많은 고민도 했다고 술회했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정치에 관여했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결코 이 박사가 하는 일에 관여한 적이 없으며 간섭을 받을 이 박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 대사 그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자기의 유일한 임무는 대통령의 신변을 보살피는 일이었고 이 박사가 건강하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을 다했을 뿐 세상의 소문은 근거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웃어넘긴다. 자신이 외국 태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더욱 이 박사에게 잘해드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남달리 언행도 조심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사람은 항상 고독한 법이지만 자기는 이 박사의 따뜻한 애정으로 결코 외롭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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