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⑯내남편 이승만] 지독한 절약정신, 22년간 미장원 가지 않고 쪽머리로 산 프란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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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⑯내남편 이승만] 지독한 절약정신, 22년간 미장원 가지 않고 쪽머리로 산 프란체스카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4.16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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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대사 부임하면 프란체스카에게 인사하러 와
금성사에서 기증한 에어컨 돌려보내고 아주 더울 때 선풍기 한두 번 틀어
22년간 오스트리아 한 번도 안 가, 연락은 전화대신 편지로
이화장에서 아들 이인수, 조혜자 부부와 함께 한 프란체스카.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할 때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는데 우선 그 돈으로 틀니를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조혜자 씨가 왜 외국에 있는 동안 틀니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 단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
 
메디컬센터 치과과장 최상열 박사가 만들어 준 틀니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 방문할 때면 “한국에서 틀니를 하고 가라. 틀니는 한국이 최고”라고 말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틀니를 하라고 당부했다.
 
조혜자 씨는 오스트리아를 외가집이라고 말한다. 오스트리아 대사가 부임하면 언제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이화장에 다녀갔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프란체스카의 절약정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이인수 씨가 양자로 하와이에 가면서 선물했던 국산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하는 등 절약에 있어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평이다.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다. 1976년에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하자 프란체스카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금성사에서 다시 작은 선풍기를 보냈는데 아주 더울 때 겨우 한두 번 트는 것이 고작이었다.
 
191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입한 앨범에 옛날 사진을 떼고 손자들 사진을 붙이기도 했다.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으며 1904년에 산 타자기로 남편의 독립운동과 한국 외교를 돕고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의 옷은 어느 것 하나 깁지 않은 것이 없으며 속옷과 스타킹까지 기워 신었다. 손자들의 체육복을 몇 번이나 기운데다 아랫단을 여러 번 내는 바람에 손자들이 창피하다며 학교 가기 싫어했을 정도이다.
 
프란체스카는 가난하던 시절 경무대에서 알뜰하게 살던 것보다 더 알뜰하게 여생을 보냈다. 이화장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만들어 먹었다. 점심에는 감자가 주식이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들거나 현미, 보리 콩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먹었다.
 
가뭄이 들었다는 TV뉴스가 나오면 손자들 목욕도 시키지 못하게 했다. 며느리에게 세세한 것까지 가계부에 적게 한 후 15일마다 검사했다. 검사할 때마다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근검 절약을 생활화해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조혜자 씨는 어머니가 늘 겨울에 추위에 떨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다.
 
“기름값을 아끼려고 겨울이면 비좁은 경비실로 옮겨서 생활하셨어요. 기름을 함부로 때는 것은 달러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너무 추울 때면 저에게 72도 작전을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둘이서 껴안고 있으면 온도가 72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어머니와 가난해서 더 친해졌을 정도예요. 너무 추워서 1985년에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이화장 본관 아래 이층집을 지었어요. 말년에 좀 따뜻하게 지내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정말 지독하게 절약하신 분이에요. 밥알 하나, 두부 한 모, 콩나물 하나 버리면 큰일이고 식사를 할 때 늘 접시가 깨끗했어요. 평생 돈 한번 마음놓고 써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죠.”
 
22년 동안 미장원에 한 번도 가지 않고 머리를 길러 쪽을 졌다. 세제는 반드시 정량만 사용하고 빨래한 물을 모아서 걸레를 빨았으며, 세탁기는 남북통일 되면 사용하라고 해서 조혜자 씨는 1985년이 되어서야 겨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느 해인가 독도사랑회에 프란체스카는 10만 원을 기탁했다. 조 씨는 남들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10억 원만큼 큰돈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한 뒤 22년 동안 한 번도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화도 하지 않았다. 이인수 씨가 1972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8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들에게도 국제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조혜자 씨는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전화를 못하게 해 두세 번 정도 몰래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척에 있는 가족을 못 만나는 이산가족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남편도 8년 동안 딱 두 번 한국에 다녀갔어요. 생부가 돌아가셨을 때와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든 연락을 편지로 했는데 항공우편 대신 가격이 훨씬 싼 배를 이용했다. 추석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12월에 받아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생일카드도 생일 몇 달 전에 미리 발송했다. 미8군사령관을 지낸 매구르더 장군에게 생일 몇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장군이 이미 사망한 일도 있었다.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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